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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칼럼

울릉문화유산지킴이 동해안 1차 답사 보고 (1편)

울릉도(독도) 해양역사문화자원의 가치 재조명 올바르게 계승하자
김윤배 박사,울릉문화유산지킴이 회장 일행 탐사기행

2016년 3월 27일, 울릉도 미래세대의 소중한 보물인 울릉도(독도) 해양역사문화자원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올바르게 계승해보자는 취지에서 발족한 울릉문화유산지킴이. 

그동안 2년 넘은 기간 동안 22차의 월례 정기 모임을 통해 울릉도의 다양한 문화자원, 지질자원, 해양수산자원, 농업자원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심도 깊은 발표와 함께 회원들간의 격의없는 토론을 통해 울릉도의 가치를 살펴본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다. 

특히나 울릉도에 뱀이 없는 이유 혹은 울릉도 호박엿 유래 등 울릉도의 구체적인 의문점까지도 살펴본 흥미로운 모임들이었다. 

22차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쌓인 회원 상호간의 유대관계와 한반도권에서 울릉도가 갖는 가치를 새롭게 조명해보자는 취지에서 23차 모임의 일환으로 <동해안 1차 답사>를 떠나게 되었다.

동해안 1차 답사는 지난 6월 16일(토)~18일(월)
울릉도→포항→경주→포항→영덕→울진→포항→울릉도에서 진행 했다.



이번 답사에는 울릉도에 대한 각계 전문가 가운데 김윤배 (울릉문화유산지킴이 대표, KIOST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근무) 남구연 (울릉군 농업기술센터 근무) 한외자 (지질공원해설사) 송미화 (독도아카데미해설사) 이경애 (지질공원해설사) 임선자 (지질공원해설사) 권은숙 (지질공원해설사) 이정옥(지질공원해설사) 등  8명이 참석했다.

탐사 첫째날( 6월 16일: 토)

원래 일정은 6월 15일(금) 울릉도를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동해남부해역 풍랑특보에 따른 포항행 썬플라워호 결항으로 부득이 하루 연기하게 되었다. 

특히나 울릉도는 모두 오후에 육지행 여객선이 출항하는 관계로 평상시면 육지에 도착하면 저녁이라 사실상 하루 일정이 모두 버려야할 처지이지만, 다행히 6월 16일(토) 지난 밤 결항했던 썬플라워호가 새벽5시에 울릉도를 출항하는덕에 일정을 무리없이 진행할 수가 있었다.

16일 아침8시 30분, 썬플라워호가 포항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면서 우리 일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침녘 죽도시장 거리에서 간단한 아침식사후 첫 방문지로 근처의 옛 울릉도 여객선이 출항하던 동빈다리 근교를 답사했다.

포항 동빈다리에서 울릉도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다
1967년 동빈내항(동빈다리 아래 통로전시물 촬영)
울릉도 근현대사를 돌이켜보면 몇 번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있었다.
1882년 울릉도 재개척 착수, 1963년 포항과 국회의원선거 통합 및 포항-울릉간 정기 교통선 취항,
1995년 포항-울릉간 쾌속선 썬플라워호 취항이 대표적인 경우라 생각한다.
2018년도 울릉 일주도로 개통도 상당히 의미있는 근현대사의 사건이라 생각된다. 

돌이켜보면 울릉도 근현대사는 육지와의 교통과 매우 의미깊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첫방문지를 포항-울릉간 교통선이었던 청룡호 및 동해호, 그리고 그 이전의 금파호의 주 정박지였던 포항 동빈내항을 찾았다. 

포항 동빈내항 다리 인근에는 아직도 청룡다방, 울릉상회 등 당시의 흔적을 기억하는 가게의 상호들이 남아있다. 

동빈다리 아래에는 1967년도 동빈내항의 항공사진도 남아있다.
이곳에는 1962년 6월, 포항항 개항을 기념하는 <포항개항지정기념비>가 자리잡고 있다.


울릉도에 정박중인 청룡호
사실 이 동빈내항 근교는 아직까지도 포항의 울릉도 거리라고 할 수 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당시에 부산~영일만~울릉도을 운항하는 정기선 취항,
1914년 울릉군이 당시 경상남도(1906~1914)에서 경상북도로 행정구역상 편입 무렵 이후 부터 오늘날까지도 포항은 육지를 드나드는 울릉도 사람들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다.

특히나 동빈내항 근교가 그렇다.
이곳 동빈내항 근교 답사를 하는 내내 동빈내항 근교의 울릉도와 포항 교류의 역사적 자원을 활용해 이웃 죽도시장과 연계한 <포항의 울릉도 거리> 조성을 통해 포항-울릉도를 연결한 관광자원을 활성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지나온 역사는 그것을 어떻게 품느냐에 따라 훌륭한 미래자원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포항과 울릉도는 청룡호가 그렇듯, 썬플라워호가 그렇듯 영원한 동반자 인것은  사실이다.
어제의 기상악화로 예정된 일정보다 짧아진 일정으로 잠깐의 동빈다리 답사를 마감하고 다음 방문지인 포항 호미곶을 찾았다. 

통상 호미곶 하면 국립등대박물관과 호미곶 해맞이 광장을 먼저 방문지로 떠올린다.
하지만 이곳 호미곶이 갖는 지형적 특이점 혹은 호미곶 등대와 국립등대박물관이 세워진 역사적 이유를 알기 위해서 먼저 들러볼 곳이 <실습선 쾌응환 조난기념비>이다. 




호미곶 등대의 우측편 구만항 인근의 흔히 독수리 바위라 부르는 바위의 바로 인근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다.

한반도 수산자원 침탈의 역사 그리고 등대의 필요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습선 쾌응환 조난 기념비
이 기념비가 세워진 내력은 이렇다. 

1907년 7월 7일, 일본 수산강습소(현재의 동경수산대) 실습선 쾌응환이 어업실습을 위해 일본 동경인근의 시나가와항을 떠나 영일만으로 출항후 항해 중인 1907년 9월 9일, 태풍으로 호미곶 인근 암초에 좌초되어 기사1명, 학생 3명 등 4명이 사망하는 조난사고가 발생하게 된다.

이 조난 사건은 1908년 12월, 호미곶 등대가 세워진 결정적 계기가 되면서 호미곶 등대의 오랜 역사는 1985년 이곳 호미곶에 등대박물관 건립으로까지 이어진다. 

비록 1926년 건립된 원래의 조난기념비는 지역민들의 일제잔재 제거 차원에서 훼손되었다가 1971년 재일동포의 손에 의해 재건립되는 역사도 겪었지만, 바다 항해에서 등대가 갖는 중요성을 절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칠흙같은 어둠속에서 등대가 밝히는 불빛은 어민들에게 귀중한 희망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불어 이 기념비에 주목할 대목은 이 쾌응환이 한반도 동해안을 항해한 이유와 그 시기이다.
쾌응환은 1907년 어선실습을 위해 일본 동경의 시나가와항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향했다.

일본은 자국 연안의 수산자원 고갈로 자국 어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1883년 7월, 일본인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의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할 수 있다는 조선과 일본간의 통상장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 통상장정을 계기로 일본의 어민들이 동해안과 남해안으로 적극 진출하면서 항구를 거점으로 한반도 수산자원 침탈을 이어갔다. 

1903년 무렵 일본어민에 의해 시작된 울릉도 연안의 오징어잡이 또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한 단면이다.
이러한 일본어민들의 한반도 수산자원 침탈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 정부에서는 한반도 연안에 대한 수산자원 조사를 강화하고 이의 결과로 1908년에는 한반도 연안의 인문자원은 물론이요 수산물 정보까지 망라한 <한국 수산지>를 조선통감부 수산국에서 발행하게 된다. 

1907년 실습선 쾌응환은 이러한 한반도 수산자원침탈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한 어장조사와 그러한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실습 차원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 바로 <실습선 쾌응환 조난 기념비>이다.

쾌응환 조난기념비 답사를 마치고 바로 인근의 국립등대박물관과 호미곶 등대를 향했다.
호미곶 등대는 등고(登高)가 31m로, 우리나라 38개의 유인등대 중에서 등대의 해발고도가 가장 낮은 등대로서 지형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통상 등대는 해안가에 위치한 산의 정상부에 높이 설치하여 멀리에서도 등대의 불빛이 보이도록 하지만, 이곳 호미곶의 지형적 특성상 해안가에 바로 설치하게 된 것이다.

호미곶 등대에서 대한제국을 돌아보다.

실습선 쾌응환의 조난을 계기로 1908년 12월, 첫 등대를 밝힌 호미곶 등대. 동해안의 바닷길을 100년 넘게 지켜온 등대로서 그 묵직한 역사를 가득 품고 있는 높이 26미터의 팔각의 각진 모습이 참 이채롭다.
그동안 외형만 보다가 다행히 동행한 임선자 해설자 분이 등대관리소 직원과 친분이 있어 그 내부를 처음으로 살펴보았다. 

등탑의 천장에 오얏꽃(배꽃,梨化)문장이 선명했다.
사실 이 오얏꽃 문양은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 문양이다. 

해양문화 국내 최고전문가이신 주강현 교수님은 저서 등대문화사에서 이 오얏꽃 문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이 오얏꽃 문양 대신에 자신들의 국화문장을 새겼으며, 해방이 되어 철판을 떼내자 아무도 몰랐던 오얏꽃 문양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물론 한일병탄 직전인 1908년 11월 대한제국때 이 등대가 건립되지만, 이 등대를 건설한 주체가 일본인이었기에 이 오얏꽃을 두고 다른 해석이 있기도 하다.
호미곶 등대의 역사에서 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은 흥미롭다. 

어쩌면 호미곶 등대에 새겨진 대한제국 황실의 상징 오얏꽃 문양은 점차 국권을 침탈받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되는 대목이다.
이후 호미곶 등대와 함께 위치해 있는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국립등대박물관은 우리나라 등대의 역사와 등대원의 삶 등 여러 좋은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역시나 눈길이 가는 것은 울릉도와 독도 등대 자료이다.
사실 울릉도와 독도 등대의 역사는 국내 다른 등대의 역사에 비해 비교적 짧은 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는 1903년 불을 밝힌 인천 팔미도 등대이다. 

울릉도(독도)의 경우, 독도 등대가 1954년 8월 10일 첫 점등을 하고, 이어서 울릉도 도동 등대가 1954년 12월,
그리고 울릉도 태하 대풍감에 위치한 울릉도 등대가 1958년 4월 점등 됐다.
자료 : 1954년 8월 8일자 조선일보

        ◆ 독도등대 모습

1954년 8월 10일에 독도 등대 점등의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의 독도 활동을 시작한 직후인 1954년 5월 23일, 5월 24일, 28일 등 수차례에 걸쳐 일본 순시선이 독도 근해에 침몰하는 사건이 빈번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독도 침해 사건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국회의원 등으로 구성된 평화선 시찰단을 조직하여 독도를 직접 방문했다. 

당시 독도를 찾은 국회의원들은 시찰 결과를 보고하면서 정부에 독도에 대한 대한민국 주권행사 일환으로 독도에 등대를 세우라고 주문한 직후에 독도 등대가 건립된다.

즉, 독도 등대의 건립 배경은 호미곶 등대의 건립 배경과 다르게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을 행사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립등대박물관의 전시물을 둘러보며 하나 흥미로운 안내판이 눈에 뛴다. 회전형 등대 전시물이다.
울릉도는 지형적 혹은 공간적 특성상 관광홍보물 배치가 제한받기 쉽다. 

회전형 전시물은 이러한 공간적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좋은 대안으로 보인다. 

함께 동행한 울릉군청 농업기술센터 남구연 계장은 울릉도 산채에 얽힌 흥미로운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다.
여객선 터미널에 울릉도를 소개하는 시를 곁들인  관광홍보물을 함께 배치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사기행제공: 울릉문화유산지킴이>